가문을 빛낸 인물

豐山柳氏

류자온 (柳子溫)

1453 ~ 1502.1.10

자(字)는 직이(直而).

1474년(성종5년)에 식년 사마시(司馬試,進士)에 합격하여 창원교수를 지내셨고,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류공작 (柳公綽)

1481.8.27. ~ 1559.5.26.

자(字)는 유재(裕哉)로서 통훈대부, 간성군수를 지내셨고 숭록대부, 의정부 좌찬성겸 판의금부 부사에 추증되었다.

류중영 (柳仲郢)

1515 ~ 1573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서, 간성군수를 지내신 류공작(柳公綽)의 아들로서, 자는 언우(彦遇), 호는 입암(立巖)이다.

안동하회마을의 입향조이신 류종혜(柳從惠) 공의 5대손이며, 영남지방의 사족(士族)으로 풍산류씨 가문의 중흥을 일군 인물로서,
류운용(柳雲龍), 류성룡(柳成龍) 형제의 아버지이다.

1540년(중종35년) 식년시 문과(式年試 文科)에 급제하여 의주목사, 황해도 관찰사 겸 병마수군 절도사, 정주목사, 승지, 예조참의 등의 관직을 역임하셨다.
사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고 풍산부원군(豐山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문집으로 입암일고가 전한다.

류경심 (柳景深)

1516 ~ 1571

정5품 정랑을 지낸 류공권(柳公權)공의 아들로서, 자는 태호(太浩), 호는 귀촌(龜村)이다. 1537년(중종32년)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154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다.

1546년(명종1년)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한 이후, 회인현감, 유신현감, 광주목사, 함경도 병마절도사, 병조, 호조참판, 대사헌, 평안감사 등을 지냈다. 문집으로 귀촌집이 전한다.

류중엄 (柳仲淹)

1538 ~ 1571.12.25.

자(字)는 희범(希范)이고 호는 파산(巴山)이다.

일찍이 퇴계의 문(門)에 유학(游學)하여, 공자(孔子)의 문(門) 안회(顔回)에 비견된다는 칭송을 받았다. 안동의 타양서원(陀陽書院)에 봉안(奉安)되셨고, 예안의 분강서원(汾江書院)에 배향(配享)되셨으며, 파산일고(巴山逸稿)가 있다.

류운룡 (柳雲龍)

1539 ~ 1601

조선조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응현(應見), 호는 겸암(謙菴)이다. 퇴계 이황(李滉)의 고제(高弟)로서 16년간 그 문하에서 가르침을 받았다.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모든 경사를 통독함으로서, 사문의 촉망을 받았다. 스승의 별세 뒤에는 유업을 계승하는 일에 열중하여, 도산서원(陶山書院) 건립과 퇴계집(退溪集), 이학통록(理學通錄) 간행사업에 매진하였다. 특히 부친 류중영과 그 선조들의 사적을 정리하여 저술로 남겼다. 이를 통하여 하회의 풍산류씨가 이 풍류의 중심적 위치를 갖게 되었으며, 류씨의 가학이 그를 통하여 반석에 섰다고 말할 수 있다.

1572년(선조5년) 친명(親命)으로 음사(蔭仕)를 받아 출사하여 선조때 전함사 별좌를 지냈으며, 이어 사포서 별제가 되었고, 금부예천과 풍저창 직장 등을 역임하면서, 청렴하고 철저한 임무 수행 능력을 인정받아 내자시 주부로 승진한 뒤, 인동현감, 풍기군수, 원주목사 등을 지내셨다.

1592년 4월(선조 25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영의정 류성룡이 선조께 형님을 해직시켜 피난길에 어머니를 보호할 수 있도록 읍소하여, 어머니를 비롯한 온 가족들을 무사히 피난케 하여 모두가 류운용의 효심을 칭찬하였다.
1592년 가을에 풍기군수(豐基郡守)가 되어, 전란인데도 공물을 평시와 같이 하였고, 왜적들의 위협을 받고 있는 백성들의 생업을 보살폈다. 이어 원주목사로 재임하면서 군국기무(軍國機務)에 관한 소(疏)를 선조에게 올려 인정을 받아 조의(朝議)에서 화제가 되기도 했다.(군국편의소 軍國便宜疏) 1598년 봄(선조31년)에 어머니를 모시고 태백산(太白山) 아래 도심촌(道心村)에 우거하였고, 12월에 낙향한 동생 성룡과 함께 지냈다.

저서로는 문집인 겸암집(謙菴集)이 전하며 기사문상장시사(記師門喪葬時事)를 지었다.

1605년에는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 3등에 녹훈되었다. 안동하회의 화천서원(花川書院)과 예천 우곡서원(愚谷書院)에 봉향되었으며,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추증되었고, 1834년 7월에 문경(文敬)의 시호(諡號)를 받았다. 또한 고려조 길재(吉再)의 묘역을 정화하고 사우(祠宇)와 서원을 지어 유학의 진흥책을 도모한 공덕으로 송덕비가 세워졌다.

류성룡 (柳成龍)

1542.11.7 ~ 1607.5.6

조선중기의 문신, 학자, 경세가, 저술가이다. 1542년 11월 7일(음력 10월1일) 조선 경상도 의성현 사촌리(현 경상북도 의성군 점곡면 사촌리)에서 출생하였으며, 자(字)는 이현(而見) 호(號)는 서애(西厓)다.
간성군수 류공작(柳公綽)의 손자이며, 황해도 관찰사 류중영(柳仲郢)의 차남이다.

21세 무렵에 퇴계 이황의 제자로 들어가 책을 읽을 때 한번 눈을 스치면 환히 알아 한글자도 잊어버리는 일이 없을 정도였으며, 퇴계의 수제자로 명망이 높고, 퇴계도 “이사람은 하늘이 내린 사람이다(天之所出者)”라며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
어린시절 한양으로 올라와서 지내면서, 이때 충무공 이순신과도 친밀하게 지냈다. 한양에 살 무렵에는 묵사동(중구 필동)에 살았는데, 현재 필동에 가면 “서애길”이 마련되어 있고, 또한 그곳에 류성룡 집터라는 표석이 있다.

1564년 명종때에 사마시(소과)에 합격을 했고, 1566년(명종21년) 10월에 별시 문과 과거시험에 급제를 하였다. 이어 한원(翰苑)에 들어갔다가, 승문원 권지부정자가 되어 관직을 시작하였다.

그 후 경연검토관(經筵檢討官), 홍문관 직제학(直提學), 홍문관 부제학(副提學), 도승지(비서실장), 대사헌, 대제학, 상주목사, 경상도 관찰사(도지사), 예조판서, 이조판서, 우의정, 좌의정 겸 이조판서, 병조판서, 도체찰사(전시 총사령관, 1592년 10월), 훈련도감 도제조(訓鍊都監 都提調), 영의정(1592년5월, 1593년 10월~1598년 10월18일)을 역임하셨다.

1590년 5월(선조23년)에는 조선조 태조 이성계의 조상이 이인임(李仁任) 이라고 명나라의 태조실록과 대명회전(大明會典)에 잘못기재된 사실이 있어(종계변무,宗系辨誣) 각고의 노력 끝에 이를 바로잡은 공로가 인정이 되어, 광국공신(光國功臣) 풍원부원군(豐原府院君)에 서훈되었다.

그 후 1599년 2월에 향리인 안동 하회마을로 귀향하여, 1604년 7월까지 약3년간 전대미문(前代未聞)의 참혹한 국제전쟁이었던 임진왜란의 실상을 기록한 징비록(懲毖錄:국보 제132호)을 저술하였다.

징비의 의미는 시경의 소비편(小毖篇)에 있는 “내가 지난 잘못을 징계하며, 후환을 경계한다.(予其懲而 毖後患)”는 구절을 인용한 것이다. 징비록의 자서에 “난중의 일은 부끄러울 따름이다.”라고 적었는데, 스스로 반성한다는 의미에서 이 책을 저술한 것이다.

1602년 4월에는 청백리로 뽑혀 염근록(청백록)에 오르고 영모록(永慕錄)을 찬술하였다.

1604년 9월에는 충훈부(忠勳府)에서 공신인 선생의 초상화(肖像畵)를 그릴 화사(畫師)를 보냈으나, 공(功)이 없다고 사양하여 그대로 돌려보냈다.

1607년 2월(선조40년)에 선생의 병보(病報)를 접한 선조(宣祖)는 내의(內醫)를 보내어 병환을 살피게 하였으나, 그해 5월 6일 경상도 안동부 풍산현 서미동 초당 정침(현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에서 향년66세를 일기로 서거 하였다. 선생의 서거소식을 들은 서울의 상인들은 3일간에 하루를 더 보태어 철시를 하고 애도를 표했으며, 백성들은 “류정승이 아니었다면 지금쯤 1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라며 슬퍼했다고 한다.

남긴 저서로는 징비록을 비롯하여 서애집, 난후잡록(亂後雜錄), 진사록(辰巳錄), 근폭집(芹曝集) 등 십수종이 있다.

그에 대한 평가로는 예악교화(禮樂敎化), 치병이재(治兵理財)에 이르기까지 연구하지 않은 것이 없었으며,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임진왜란 당시 수상으로서 국정과 군무의 총사령관을 역임하였다. 인재등용과 여러 개혁정치를 시행하여 전쟁의 피해를 수습하려 한 까닭에 재조산하(再造山河)를 이룬 재상이란 평가를 낳았다. 당시 명나라 사신 사헌(司憲)도 나라를 다시 일으킨 공(山河再造之功)이 매우 크다고 높이 평가했다고 한다.(선조26년 윤11월16일 선조실록)
또한 1599년 7월에 선조임금은 ”류성룡이 어떤 사람인지는 알수 없다만, 그가 떠나간 후로 국사가 날로 엉성해지고 더욱 해이되는 것은 무슨 까닭인지 알수 없다. 그리고 전일에 이미 삭직했다고 해서 어찌 끝내 복관(復官)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1614년(광해군 6년)에는 병산서원(안동시 풍천면 병산길386, 전화:054-858-5929)에 위판(位版)을 봉안하였으며, 그후 군위 남계서원, 여강서원(호계서원), 상주 도남서원(道南書院), 예천 삼강서원(三江書院), 의성 빙계서원(氷溪書院)등에 위판이 봉향(奉享)되어 있다.

임진왜란기의 서애 류성룡공의 활약상

전란의 징후에 사전대비하기 위하여, 1591년 7월에 당시 정읍현감이던 이순신(李舜臣)을 전라도 좌수사(全羅道 左水使)로 천거하고, 형조정랑(刑曹正郎) 권율(權慄)을 의주목사(義州牧使)로 천거하였다.(선조실록)

또한 1592년 3월에는 전쟁에 임하여 공격과 방어에 대한 종합적인 병법서인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서책을 이순신 전라좌수사에게 보내어 실전(實戰)에 활용토록 하였다. 이에 “이순신 장군께서는, 1592년 임진년 3월 초5일 난중일기에서, 좌의정 류성룡이 편지와 “증손전수방략(增損戰守方略)”이란 책을 보내왔다. 그것을 본즉, 해전과 육전, 불로 공격하는 전술 등에 관한 것을 낱낱이 말했는데, 참으로 만고에 뛰어난 저술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년에 왜란이 발발하자, 4도도제찰사(四道都體察使)로 임명이 되어, 당쟁과 전란속에서 조선의 조정을 지휘하였다. 이때 선조임금이 동파나루에서 북행하여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내부(內附)하려는 의견이 대두되었으나,
공(公)은 “임금께서 한발자국이라도 이나라를 벗어나면 조선은 우리땅이 되지못할 것이다”라고 하며 홀로 의주를 향할 것을 적극주장하여 뒷날에 명나라 구원의 길을 열게 하였다.
이후 명나라 장수 이여송을 만나 평양성의 지도를 주면서 작전을 도와주어 평양성 수복에 크게 기여하였으며, 파주까지 진격하여 일본군을 궁지로 몰아붙이는 한편, 일본의 간첩 수십명을 잡아 정보의 유출을 차단하였다.

전란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하여, 1510년(중종5년)에 일어난 3포왜란을 계기로 하여 전투가 벌어지는 거점지역에 각 진관의 수령이 휘하 군사들을 이동시키고, 중앙정부에서 보낸 군사전문 지휘관의 지휘를 받는 전략인 기존의 제승방략(制勝方略)전략이, 국가의 위급 전란시에는 즉각적인 전투에 효과적이지 못하다는 문제점을 지적하고, 1457년(세조3년)에 마련되어 시행한 바 있는 진관체제(鎭管體制, 수령(지방관)이 각각 군대를 거느리고 각도에 병영을 설치하여 주진(主鎭)과 그 아래에 거진(巨鎭), 제진(諸鎭)을 설치하여 각 지역의 지방관이 지휘하는 체제로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전술전략 지휘체계)가 왜적을 방어하기에는 더욱 효과적이라는 점을 적극 주장하여, 1593년(선조26년)에 진관법이 시행되게되어 왜적방어에 크게 기여하셨다.

1593년 7월에는 명나라 장수 척계광(戚继光, 1528년 11월 12일 ~1588년 1월 17일)이 1560년에 저술한 전쟁전략, 훈련, 진법 등에 관해 명료하게 저술한 병법서인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적극적으로 도입하여, 1594년 2월에 훈련도감(訓鍊都監)을 설치하였고 그 책임자가 되어 조선 최초의 직업군인을 양성하였다.

1594년(선조27) 4월에는 공물작미법(貢物作米法)을 만들어 백성들을 구제하고 전시 군수에 충당토록 하였으며,

전쟁 수행중에는 명나라와 일본이 조선을 배제한채, 비밀리에 조선땅 8도 가운데 4도(경기, 충청, 경상, 전라)를 일본에 이양(移讓)한다는 소위 할지론(割地論) 협상도 모든 지혜와 노력으로 이를 막아내었다.

7년 간의 임진왜란 중에는 삼도수군 통제사 이순신과 30여 차례나 서신과 의견을 교환하는 등 왜란극복을 위하여 혼신의 노력을 다 하였다. 1604년(선조37년)에는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 되었다.

그후 1609년 2월(인조7년)에는 문충(文忠) 시호(諡號)를 받았다.
公은 임진왜란이라는 우리 역사의 미증유(未曾有)의 국가적 위기를 당하여 한몸을 던져 도탄에 빠진 백성을 구제하고 명군(明軍)의 양향(糧餉)을 조달할 뿐 아니라, 도체찰사(都體察使)로서 왜적을 반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 위인(偉人)이시다.

국가와 백성에 대한 이러한 공로로 조선조 5대 명재상(名宰相)으로 불리우고 있다.

  • - 황희(黃喜, 태조~세종 1363.3.8.~1453.2.28. 영의정 등 역임)
  • - 류성룡(柳成龍, 명종~선조, 1542.11.7.~1607.5.31. 조선 제84대 영의정 등 역임)
  • - 이원익(李元翼, 선조 1547~1634 영의정 등 역임)
  • - 김육(金堉, 효종~현종, 1580~1658.9 병조판서 등 역임, 대동법 시행)
  • - 채제공(蔡濟恭, 영조~정조, 1720.5.12.~1799.2.22. 영의정 등 역임)

류종개 (柳宗介)

1558 ~ 1592

자는 계유(季裕), 1585년(선조18년, 을유년) 식년병과(문과)에 합격한 후로 성균관 전적, 의병장 등을 지냈다.

특히 임진왜란시에는 의병장으로서 왜적 퇴치에 크게 공을 세웠으며, 봉화군 소천 전피현(箭皮峴) 전투에서는 왜적과 격전중에 장열히 순국하였다. 예조참의에 추증되고 봉화의 경현사우(景賢祠宇)와 문계서원(文溪書院)에 제향되었다.

류진 (柳袗)

1582.7.28. ~ 1635.1.13.

자는 계화(季華), 호는 수암(修巖)이고, 1610년에 진사장원을 하였다. 이후 봉화현감, 청도,예천,합천 군수를 역임하면서 농정세제(農政稅制)를 조절하고 교학(敎學)을 진흥하여 이륜(彛倫)을 밝혔다.

그 후 가선대부 이조참편 겸 동지 의금부사 오위도총부 부총관을 역임하고, 정묘호란때는 상주의병장으로 그 강용(剛勇)을 떨쳤다. 통훈대부 사헌부 지평으로 증직되시고 안동 병산서원에 배향(配享) 되었다.

류원지 (柳元之)

1598 ~ 1674

자는 장경(長卿), 호는 졸재(拙齋)이다.

통훈대부 황간현감, 진안현감 등을 지냈으며, 병자호란시에는 안동지방의 의병장인 수은(睡隱) 이홍조(李弘祚) 선생과 함께 크게 활약하였다.

화천서원에 배향되었다

류세철 (柳世哲)

1627 ~ 1681

자는 자우 (子遇)호는 회당(悔堂)으로, 1654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신 후, 내시교관과 동몽교관 사복시 주부를 거쳐, 공조좌랑, 군위현감을 역임 하셨다.

관직에 재직 시에는 후진양성에 힘쓰시고, 사문에도 능하셨으며, 문집이 전하고 있다.

류이좌 (柳台佐)

1763 ~ 1837

자는 사현(士鉉 ), 호는 학서(鶴棲)이다.

1794.2.28.(정조18년)에 정시병과(庭試丙科)에 합격하여 김해부사, 동부승지 예조참판 등을 역임하였다.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히었고 문집이 전하고있으며, 저서로는 국조고식(國朝故寔)과 천휘록(闡揮錄) 등이 전하고 있다.

류치목 (柳致睦)

1771 ~ 1836

자는 정오(定吾), 호는 애운(厓雲)

1814년(순조14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병조좌랑, 형조참의, 우승지 김해부사 대사간을 역임하셨다. 염행당(念行堂,남촌댁)을 건축하였다.

류기영 (柳驥榮)

1824 ~ 1880

자는 사옹(士雍), 호는 학하(鶴下)이며, 철종9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여 형조좌랑을 역임하셨으며, 공께서는 염행당을 중건하셨으며, 유고가 전해지고 있다.

류후조

1799 ~ 1876

조선말기의 문신이며, 류성룡의 8대손으로 자는 재가(裁可), 호는 매산(梅山), 낙파(洛波), 영매(嶺梅),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철종대 정시 문과에 급제하여 대도호 부사로 관직에 진출하여, 사간원 대사간을 거쳐 고종때 이조참판이 되고 대사헌, 공조판서, 1866.1 우의정, 고종4년인 1867년 4월에 좌의정에 임명되었으며, 후에 판중추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872년에 봉조하가 되어 청백리로서 명망을 얻었다.(낙동대감이라는 별명이 있다.)

류도성 (柳道性)

1823 ~ 1906

자는 선여(善汝) 호는 석호(石湖)이다.

선공감역, 경상도사(慶尙都事)를 지내셨으며, 1902년에는 수직(壽職)으로 통정대부 비서원승(祕書院丞)에 올랐다. 화경당(和敬堂,북촌댁)을 중건하였으며 문집으로 7권 4책이 전하고 있다.

류태하 (柳泰夏)

1908 ~ 1981

외교관

1932년 일본 와사대학 전문부 정경과 수료

1946년 외무부 비서실 근무, 인사과장, 비서실장, 정보국장 역임

1951년 7월 주일대표부 참사관

1958년 10월 주일대표부 공사

1959년 3월 주일대사 역임

우리나라 건국초기 외교관으로서 어려운 대내외 여건하에서도 외무부 및 주일대사로 근무하면서, 임무를 훌륭히 완수하여 우리나라 외교지평을 넓히는데 크게 기여하셨다.

류찬우

1923.5.19. ~ 1999.11.24.

풍산그룹 창업회장

1968년 10월 22일에 비철금속(신동사업과 방위산업) 제조기업인 풍산금속공업을 설립하여, 신동사업 부분은 동(銅), 동합금 판제나 주석도금제, 동관 등을 생산하였으며, 현재는 냉방용 동관도 생산하고 있다. 그리고 동전제작을 위한 민무늬의 동전 원재료인 소전(素錢)을 제작하면서 기업을 크게 발전시켰으며, 각종 구경의 탄약을 생산하여 우리나라 방위산업 발전의 크게 기여하였다. 1989.3월에 ㈜풍산으로 사명을 변경, 더욱 산업발전에 기반을 닦았다. 또한 학록잡학재단을 설립, 우리나라 우수인재 양성에도 심혈을 기울였으며, 풍산류씨 대종회 발전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류돈우

1933.5.10. ~ 2021.10.24.

대한민국의 금융인이자 제13,14대 국회의원이다.

대한투자신탁(주) 사장

한국주택은행 은행장

한국수출입은행 은행장

중소기업은행 은행장

제13대 국회의원(안동/민주정의당)

제14대 국회의원(안동/민주자유당)을 역임하면서, 우리나라의 금융산업 발전과 국회의원으로서 활동을 통하여 국가사회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다.

일제강점기시기의 선조님의 독립운동

1910.8.29.~1945.8.15

하회마을은 풍산류씨 600여 년 역사가 담긴 한국의 대표적인 동성(同姓)마을이다. 특히 조선시대 유교문화를 꽃피운 곳이기도 하지만, 한국 근대 국권피탈기에도 적지않은 역할을 하였다. 하회마을 사람들은 1895년 을미의병을 시작으로 끊임없이 항일투쟁을 이어갔다.
그 가운데 류도발 선조님은 1910년 나라가 무너지자 단식 순국하셨고, 아들 류신영 선조님도 1919년 3월 그 뒤를 따랐다. 아버지와 아들이 연이어 목숨으로 저항하는 역사를 남겼다. 3월 27일에는 마을 소년 20여명이 만송정에서 독립만세를 불렀다.
이 일로 류점등 선조님이 붙잡혀 고초를 겪었다. 1920년대 들어 류창우 선조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류병하 선조님과 류시태 선조님은 의열단 의거로 고초를 겪으섰다.
그 뒤에도 마을 사람들의 투쟁은 계속되었다. 류택하 선조님은 서울에서 학생운동을 펼쳤고, 류시승 선조님은 안동농림학교 학생항일운동을 이끌었다. 나라 밖에서는 류소우 선조님과 그의 아들 류시보 선조님, 조카 류시훈 선조님이 한국광복군으로 활약하셨다.

그 밖에도 수많은 선조님들이 시대의 과제 해결에 나섰다.

유공자명 생몰 활동 훈격 비고
1 류 도 발 (柳道發) 1832~1910 자정순국 독립장(62)
2 류 신 영 (柳臣榮) 1853~1919 자정순국 애국장(91)
3 류 점 등 (柳點澄) 1897~1954 3·1운동 애족장(95)
4 류 창 우 (柳昶佑) 1884~1921 임시정부 독립공채모집 애국장(91)
5 류 택 하 (柳宅夏) 1918~미상 비밀결사 조직활동 건국포장(07)
6 류 시 승 (柳時昇) 1923~1989 학생운동 대통령표창(02)
7 류 영 하 (柳永夏) 1924~2008 학생운동 대통령표창(19)
8 류 병 하 (柳秉夏) 1898~1987 중국방면/의열투쟁 애국장(90)
9 류 소 우 (柳炤佑) 1907~1945 한국광복군 애국장(90)
10 류 시 훈 (柳時薰) 1917~1944 한국광복군 애국장(90)
11 류 시 보 (柳時保) 1925~1994 한국광복군 애국장(90)